[영림원CEO포럼] 지금 우리가 처칠의 ‘리더십’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
[영림원CEO포럼] 지금 우리가 처칠의 ‘리더십’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
  • 박시현 기자
  • 승인 2024.03.11 08: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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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향 동북아역사문화재단 이사장, 192회 영림원CEO포럼에서 강연
박지향 동북아역사문화재단 이사장
박지향 동북아역사문화재단 이사장

[아이티비즈 박시현 기자] 박지향 동북아역사문화재단 이사장이 7일, 192회 영림원CEO포럼에서 ‘윈스턴 처칠 리더십, 운명과 함께 걷다’를 주제로 강연했다.

박지향 이사장은 “왜 지금 우리는 처칠을 기억해야 할까? 역사상 가장 위대한 리더 가운데 한명이기 때문이다. 처칠 리더십의 핵심은 국민에게 동기를 부여하고, 그들이 하고 싶어하지 않던 일을 하도록 만들고 나아가 자부심을 느끼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국민이 원하지 않는 일을 하도록 만든 것, 강제가 아니라 영감을 주어 기꺼이 하도록 만든 것, 그것이 위대한 지도자의 능력이다. 하지만 오늘날 아쉽게도 그러한 리더십을 발견하기는 쉽지 않다. 우리가 여전히 윈스털 처칠을 기억하는 이유다”라고 밝혔다. 다음은 강연 내용

윈스턴 처칠이 남긴 신화 = 오늘 강연의 제목 ‘첫 운명과 함께 걷다’는 1940년 5월 11일, 윈스턴 처칠이 처음으로 수상이 되면서 한 말이다. 처칠은 “내 전체의 삶이 마치 이 순간을 기다렸던 것 같고 나는 운명과 함께 걷고 있는 걸 느낀다”고 말했다.

1874년에 태어나 1965년에 사망한 처칠은 여러 신화를 남겼다. 2002년 BBC가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처칠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영국인 100명 중 1위를 했다. 또 2003년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 폴란드 등 유럽 6개국인들은 19세기 이후 가장 위대한 유럽인으로 처칠을 선정했다. 여러 유럽의 도시들을 다니다 보면 ‘처칠 스트리트’라고 하는 데가 많다. 그만큼 유럽인들은 아직도 처칠을 기억하고 있다.

처칠은 영국에서 ‘의회의 아버지(Father of House)’라고 불렸다. 가장 오래 연속적으로 하원을 지낸 분을 ‘의회의 아버지’라고 부르는데 처칠은 1900년부터 1959년까지 2년 빼고는 거의 연속적으로 하원의원을 지냈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공작 작위를 주겠다고 했지만 처칠은 하원의원으로서 생을 마치겠다며 거절했다.

처칠이 오늘날까지 시사하는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유주의를 신봉했다는 점이다. 문명의 핵심은 개인의 자유라는 것이며, 개인의 자유를 지키는 것이 바로 인류 전체의 문명을 지키는 것이라는 신념을 확실히 가지고 있었다. 처칠이 그렇게 나치즘과 공산주의에 대해 아주 거세게 반발한 것도 바로 개인의 자유를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왜 지금 처칠인가? = 처칠은 히틀러와 스탈린의 의도를 파악한 거의 유일한 정치인이었다. 어떤 평자는 “처칠은 세계사의 거대한 흐름을 두 번 바꿨다. 한 번은 1940년 히틀러와 맞서기로 했을 때, 또 한번은 1946년 스탈린주의에 반대했을 때이다”라고 했다.

처칠은 명문장을 굉장히 많이 썼다. 그 중 하나로 1952년 의회 연설에서 “허약함이나 공포로부터 나오는 유화는 헛되고 치명적이며 힘으로부터 나오는 유화만이 세계 평화를 위한 유일하고 확실한 길이다”라고 말했다. 한국전쟁이 진행되고 있는 동안에 이 말을 했는데 힘이 있을 때야만 유화(평화만이 살길이다)도 작동한다는 것이었다.

왜 지금 처칠을 기억해야 하는가? 가장 중요한 것은 리더십이다. 19세기, 20세기 아니 21세기까지 포함해 정치인으로서 처칠만큼의 리더십을 보인 사람은 별로 없었다. 1940년 6월에 처칠은 영국 혼자서라도 전쟁을 해 나갈 것을 결단했다. 1939년 9월에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하고 1940년 5월에 프랑스가 마지막으로 점령을 당하면서 6월쯤 되면 유럽에 남아있는 나라가 없었다. 미국을 포함해 거의 모든 세계인들이 이제 영국도 항복을 하거나 히틀러와 타협을 할 것으로 생각한 순간에 처칠은 영국 혼자서라도 전쟁을 해 나갈 것이라고 결단했다.

처칠의 이 결단은 국내외적으로 큰 반발을 일으켰다. 적당히 타협하고 살아남자는 반응이 많았다. 결국 2차 세계대전은 미국과 소련이 참전함으로써 연합군의 승리로 끝나는데 미국과 소련이 참전하기 전에 1년 동안을 영국 혼자서 히틀러에 대항해 투쟁을 했고 견뎌냈다. 이것이 바로 처칠의 위대함이다.

처칠은 언젠가는 미국이 참전할 것이고 그때까지 버텨내기로 하고 수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을 설득해 나갔다. 만일 처칠이 버티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세상은 완전히 바뀌었을 것이다.

그래서 1945년 2월 미국의 루스벨트, 영국의 처칠, 소련의 스탈린이 모인 얄타 회담 때에 만찬을 하면서 스탈린이 건배사에서 “역사상 이 세상의 미래가 한 사람의 용기에 그토록 의지했던 때를 생각할 수 없다. 처칠 수상이 만약에 그때 그렇게 결단을 내리지 않았으면 이 세상이 어떻게 됐을까”라며 찬사를 보냈다.

처칠은 이렇게 결단을 하고 반대하는 국민들을 끌고 갔는데 장밋빛 전망만을 제시하지 않았다. 1940년 6월 처칠이 결단을 한 후 1942년 10월 영국군이 처음 승리를 할 때까지 2년이 넘는 기간 동안 영국군은 간신히 방어하고 견뎌낸 상태였다. 처칠은 전체 전쟁 상황을 아주 자세하고 솔직하게 국민들에게 설명했다.

◆강압이나 폭력이 아닌 영감을 주는 지도자 = 그리고 처칠은 이러한 리더십을 발휘하는 데 있어 히틀러나 스탈린처럼 강압적이고 폭력을 써서 국민들을 이끌어 내지 않았다. 곧 영감을 주는 지도자였다. 영국 국민들은 나치에 대항해 싸우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냥 적당히 타협해 살아남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처칠은 국민들이 원하지 않는 일을 하도록 했으며 그것도 강제가 아니라 영감을 줘서 기꺼이 하도록 만들었다. 이는 결국 영국인들에게 인류의 문명을 우리 혼자만 지키고 있다는 명예와 자존심을 갖게 했다.

처칠이 한 말 중에 처칠의 특성을 가장 잘 표현하는 한마디만 선정한다면 무엇일까. 바로 “절대로, 절대로, 절대로 포기하지 마라”이다. 처칠은 젊은 시절부터 스스로는 물론 주변의 친지들에게 항상 이 말을 했다. 수치스러운 평화를 구하기보다는 쓰러질 때까지 싸우자고 독려했다. 이것은 단순히 영국만의 생존이 아니고 인류 문명의 생존을 위해서였다. 서구 문명의 핵심은 법, 개인의 자유, 기독교이다.

처칠의 생애 = 처칠은 영국의 명문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유산을 거의 받지 못했다. 영국은 장자상속법에 따라 장남이 모든 것을 갖는다. 처칠의 아버지는 차남으로 별로 돈이 없었고 어머니는 미국의 백만장자의 딸로 사치스럽고 바람둥이였다.

처칠은 어렸을 때 외롭게 자란 소년이었다. 아버지는 재무장관까지 한 훌륭한 정치인이었지만 대단히 차가웠고 아들에 대한 기대치가 너무 높아서 항상 야단을 치는 사람이었다. 처칠은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이후 여러 전장에서 활약했다. 특히 1899년~1902년의 보어전쟁에 장교로 참전했는데 포로로 잡혔다가 탈출하는 과정을 <나의 청춘>이라는 책에 자세하게 쓰고 있다. 60여 시간을 화물차에 숨어서 살아 돌아오자 국민적 영웅이 됐다.

그런데 처칠은 다시 전쟁에 참전하게 되고 귀국 후에 국민 영웅의 이미지가 그대로 남아있어 이에 힘입어 25세에 정치에 입문해 90세에 은퇴했다. 1940~1945년, 1951~1955년 두 차례에 걸쳐 수상을 했으며, 1908년 상무부 장관을 시작으로 내무부, 해군부, 재무부 등 8개 부서의 장관을 역임했다.

처칠은 보수당에서 자유당으로 다시 보수당으로 두 번 당적을 바꿨는데 기회주의적인 요소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는 자신의 신념 때문이었다. 1904년 자유당으로 간 것은 급진적인 사회 개혁을 원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자유당에서 많은 업적을 냈다. 그러다가 1924년 다시 보수당으로 돌아왔는데 그 과정은 이러했다. 20세기 전쟁을 겪으면서 영국의 양당 제도는 보수당과 노동당으로 바뀌고 자유당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린다.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에 반감을 갖고 있었던 처칠은 자유당이 노동당과 손잡자 여기에 남을 수 없다며 다시 보수당으로 돌아왔다.

처칠은 1929년 재무부장관을 끝으로 이후 1939년까지 10년간 야인으로 지냈다. 이 기간동안 처칠은 그림을 많이 그렸으며 글도 많이 썼다. 처칠은 1953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할 정도로 글을 잘 썼다. 처칠은 1965년 1월 24일 서거하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신 날과 같은 날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과 브리튼 전투 =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하겠다. 히틀러는 1933년 1월 총통에 취임한 후 일련의 국제법을 위반하는데 대표적인 것이 비무장지대로 놔두게 돼 있던 라인란트를 재점령하고, 오스트리아를 강제합병한 것이었다. 하지만 서방측에서는 이를 그냥 놔두었다. 그러자 히틀러는 또 다음 단계로 한번 건드려보는 짓을 1933년부터 1939년까지 계속했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1938년 9월 체코슬로바키아 주데텐란트를 나치에게 넘겨주는 내용이 담긴 뮌헨 협정이었다. 히틀러는 1939년 8월 23일 스탈린과 독소불가침 조약을 맺은 후 바로 9월에 폴란드를 침공하며 전쟁을 시작했다. 1940년 6월 프랑스가 항복하고 영국 홀로 남겨졌다.

1940년 5월부터 1941년 6월까지는 프랑스가 무너지고 영국 혼자 남았을 때 히틀러가 영국에다 총공격을 퍼부은 시기였다. 영국 혼자서 히틀러를 대항하고 있었던 1년간의 이 때를 ‘브리튼 전투’ 시기라고 부른다. 이 시기에는 하루에도 몇 백 대의 독일 폭격기가 날아와서 런던, 지방 도시들, 군수 산업이 있는 지역까지 대공습을 했다. 이 때를 가리켜 처칠은 ‘가장 어두운 때'라고 했다.

처칠은 말년에 만약 다시 1년을 더 살 수 있다면 언제 어디로 돌아가고 싶은지에 대한 물음에 바로 1940년 이 시기로 돌아가고 싶다고 했다. 처칠은 “영 제국이 1천년 동안 계속되더라도 그때야말로 ’가장 멋진 시간‘이었다고 말할 수 있도록 우리 의무를 다합시다”라는 유명한 연설을 했다.

결국 히틀러는 영국을 침공하지 못하고 동쪽으로 눈을 돌려 소련을 침공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히틀러 자신의 몰락을 야기하게 됐다. 당시 영국의 노동당 대표면서 극좌 이론가였던 해럴드 라스키는 “프랑스가 무너지고 난 후 모든 사람은 영국이 항복하기를 기다렸다…그러나 처칠의 에너지와 용기가 국민들 가운데 어떤 적도 무너뜨릴 수 없는 결의의 정신을 불러 일으켰다. 그는 이 나라에 통합의 마음, 항복하면 차라리 죽겠다는 결심을 불러 일으켰다”고 말했다.

◆알려지지 않은 처칠의 면모 = 보수당을 떠나 자유당으로 옮겨갔을 때 처칠은 사회 개혁에 관심이 많았다. 1908년 상무부 장관이 되어 노동계를 주관할 때는 복지 국가의 기초를 닦았다. 이를테면 영국 역사상 처음으로 노사정 위원회를 설치했으며, 실업보험도 도입했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만일 처칠이 1940년 전에 죽었으면 나라를 구한 수상으로서는 아닐지 몰라도 선구적이며 자비로운 정치인으로만 기억됐을 것이라고 했다. 그렇지만 1944년 요람에서부터 무덤까지라는 구상을 담은 베버리지 보고서에는 당시 수상으로서 재정적 감당을 우려해 반대를 했다.

처칠은 유연한 정치력을 소유한 인물이었다. 1920년대 영국과 아일랜드 분쟁을 잠재우고 남북 아일랜드의 분단을 결정한 당사자였다. 1차 세계대전 종전 후 처칠은 1921년 식민부 장관으로 임명되는데 그때 아일랜드 민족주의자들은 영국에 대항해 게릴라전을 벌이고 있었다. 처칠은 그들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내어 영-아일랜드 전쟁을 종식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원래 아일랜드 자치를 반대하는 입장이었지만 아일랜드 인들의 강렬한 자치·독립 의지를 확인하게 되고 생각을 바꾸었다. 처칠은 아일랜드 테러리스트들에게 “이제 죽이는 짓은 그만두고 대화를 합시다”며 손을 내밀었다. 특히 IRA의 전설적 대장인 마이클 콜린스와 개인적으로 친근해지려 노력했고 콜린스의 신임을 얻는 데 성공했다. 만약 처칠의 노력이 없었다면 아일랜드의 비극은 더 오래 계속되었을 것이다.

처칠은 스탈린의 공포 정치에도 엄청나게 반대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을 하자 “히틀러를 무찌르기 위해서는 악마와도 손을 잡겠다”며 대단히 유연한 정치력을 보여줬다.

처칠의 유연한 정치력은 정파를 초월했다. 1953년 11월 연설에서 “한쪽을 지지한 1,400만 유권자가 모든 지혜와 미덕을 가졌고, 다른 쪽을 지지한 비슷한 수의 유권자가 전부 바보, 멍청이에 악당일 리는 없다”고 했다. 이 말을 들은 노동당의 의원은 눈물을 흘리며 처칠은 위대한 분이며 우리는 아직도 그를 필요로 한다고 얘기했다. 처칠은 또 “만약 우리가 과거와 현재 사이의 싸움을 시작한다면 우리는 미래를 잃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처칠은 <제2차 세계대전의 역사> 6권으로 1953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처칠이 쓴 책은 총 37권으로 디킨스와 셰익스피어를 합한 것보다도 더 많다. 처칠이 쓴 책은 <영어 사용 국민들의 역사>, <몰버러공작 전기> 등이 있다. 처칠은 ’철의 장막‘, ’정상회담‘ 등의 신조어를 만들어 냈다. 그만큼 문장력과 어휘력이 뛰어났다.

처칠은 학벌에 대한 약간의 자격지심이 있었는데 끊임없이 책을 읽고 외우고 함으로써 극복했다. 미국의 한 평론가는 “처칠은 놀랄 만큼 숙달된 언어를 통해 영감을 줬다. 영국이 아무것도 가진 게 없을 때 처칠이라는 무기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는 영어를 동원해 전투에 내보냈다”고 했다.

처칠은 유명한 말을 아주 많이 남겼다. 어느 연설에서 “나는 피와 땀과 노고와 눈물밖에 제공할 게 없습니다. 우리의 목표는 승리.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승리하는 것. 그 길이 아무리 길고 어려울지라도 우리는 결코 항복하지 않습니다. 함께 갑시다. 통일된 힘으로 다 함께 나아갑시다”라는 감정적인 메시지를 전했다.

또 “역사상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소수의 사람들에게 이렇게 많은 것은 빚진 적이 없었다”고 말했다. 이 말은 브리튼 전투 때 영국의 공군들이 일당백의 용기와 능력으로 독일 비행기들을 격퇴시킨 놀라운 활약에 대해 바친 헌사였다.

그리고 “우리는 끝까지 갈 것입니다. 우리는 바다에서, 대양에서 싸울 것입니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우리는 해변에서 싸울 것이고, 활주로에서 싸울 것이고, 들판에서 싸울 것이고, 거리에서 싸울 것이고, 언덕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결코 항복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처칠의 역사적 통찰력 = 처칠은 라틴어나 수학은 싫어하고 역사와 시를 좋아했다. 스스로 역사가라고 생각했다. 역사적 통찰력을 갖춘 그는 공산주의의 불가능함을 일찍이 간파했다. 몇십 년 동안 데리고 있었던 비서에게 1953년에 “자네 생이 끝나기 전에 아마 공산주의 체제는 망할 것이다”라고 했는데 그 비서가 죽은 것은 1987년이었다. 공산주의는 1989년 무너졌다. 처칠은 공산주의가 인간의 본성을 억누르려고 해도 말살할 수는 없다고 봤다.

처칠은 1930년대 좌파 지식인들의 우매함과 위선을 지적하기도 했다. 영국의 극작가인 버나드 쇼, 또 타임머신이라는 유명한 소설을 쓴 과학 소설의 대가 조지 웰스 등이 1930년대에 소련이 이뤄낸 놀랄 만한 변화에 심취해 열광할 때에 처칠은 그들이 얼마나 어리석은가를 촌철살인의 문장으로 지적했다.

처칠의 신조어 가운데 하나인 ’철의 장막‘은 처칠이 1946년 3월 미국을 방문해 웨스트민스터 대학의 졸업 축사에서 한 말이다. 하지만 이 말을 맨 처음 한 것은 1945년 7월 아이젠하워 연합군 총사령관에게였다. 독일을 너무 약화시켜서는 안되며, 스탈린의 공산주의에 미리 대비를 해야 한다는 뜻이 남긴 말이었다. 그런데 미국의 루스벨트는 스탈린과 공산주의의 야욕에 대해서 전혀 몰랐다. 루스벨트는 1930년대에 댐 건설 등의 사회주의적 정책을 펼쳤기 때문에 스탈린과 공산주의에 대해는 별로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으며 오히려 제일 미워한 것은 제국주의였다.

처칠은 공산주의와 나치는 단지 다른 식으로 쓰인 같은 것이라며, 공산주의와 나치를 똑같이 혐오했다. 둘 다 개인을 말살하는, 그래서 사람들로부터 증오심을 불러일으키는 이념이라고 본 것이다.

처칠과 루스벨트는 서로를 존경하면서도 경외했는데 이런 두 사람 사이에 2천 통 이상의 편지와 전보가 왔다 갔다 했다. 그 내용을 보면 루스벨트는 차가운 톤이었고, 처칠은 열애를 하며 쫓아다니는 남자의 모습이었다. 나중에 처칠은 “어떤 연인도 내가 루스벨트를 연구한 것처럼 연인의 변덕스런 기분을 연구하지 않았다”는 아주 재밌는 말을 남겼다.

1943년 11월 테헤란 회담 때 처칠은 미국이 자신들에 대해서 결코 호의적이지 않다는 걸 확실하게 깨닫고 “’발톱을 드러낸 커다란 러시아 곰‘과 ’거대한 미국 코뿔소‘ 사이에 있는 ’불쌍하고 볼품없는 영국 당나귀‘, 그러나 당나귀만이 집으로 가는 길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라고 했다.

처칠과 한국과의 관계 = 1950년 한국에서 6.25 전쟁이 터졌을 때 영국의 노동당 정부는 1950년 7월, 2개 연대의 파병을 결정했지만 적극적이지 않아서 1950년 12월에도 파병이 이뤄지지 않을 것 같은 상황이었다. 처칠은 노동당 정부의 수상을 찾아가 홍콩에 있는 주둔군을 보낼 것을 주장했다. 파병을 주저하던 영국은 미국이 파병을 결정하니까 결국 홍콩 주둔군을 보냈다.

처칠은 인천상륙작전을 칭송했지만 중국을 자극하지 말 것이며, 한반도의 목인 정주-흥남에서 진군을 멈추고 압록강까지 가지 말라고 했다. 나중에 미국도 처칠의 이 안을 채택하지 않은 걸 후회했다.

처칠은 1951년 10월 두 번째 수상이 되어 한국전쟁을 보면서 두 가지를 깨달았다. 홍콩을 어떻게든지 전쟁기로부터 지켜야한다는 것이었고, 또 만일 소련이 한반도에서 전쟁을 일으킨다면 유럽도 안심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한국전쟁의 조기 타결을 원했다. 그리고 돈독한 영-미 관계의 중요성을 새삼 깨닫게 됐다.

처칠의 실책이 있다. 처칠이 군인으로 임관을 하고 처음에 주둔한 곳이 바로 인도였다. 1890년대 인도는 개명된 서양인의 눈에 매우 미개한 곳이었다. 이런 인식을 갖고 있었던 처칠은 인도 민족주의를 과소평가했다. 간디를 히틀러와 비슷한 간교한 술책가로 봤다. 그리고 불가촉 천민을 동정하고 힌두교를 싫어했다. 처칠은 그래서 예수가 만약 이 세상에 다시 돌아온다면 제일 먼저 불가촉 천민을 찾아갈 것이라고 얘기했다. 또한 일본을 과소평가했다. 1942년 1월에 영국의 싱가포르 해군 기지가 일본에 함락될지 예견하지 못했다.

처칠의 위대함 = 처칠은 엄청나게 머리가 좋았다. 항상 새로운 생각을 하는 그는 하루에 100개의 아이디어를 토해내는데 그 중에 4개 정도는 쓸 만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탱크도 처칠이 만들었다. 처칠이라는 이름이 붙은 탱크가 있다. 처칠이 만들었다기보다는 과학소설가 조지 웰스의 소설에서 영감을 얻었다. 처칠은 그런 천재성에다 엄청난 끈질김과 불굴의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확실히 알고 있었다. 위기의 순간에 국민적인 결속력을 불러일으켰다. 영감을 주는 리더십으로 패배를 위대한 승리로 바꾸었다. 용기가 있고 정직했고 유연한 정치력으로 적에게 관대했다. 패배하는 순간에도 사람들이 승리라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역사적 통찰력을 갖춘 그는 “더 멀리 과거를 볼수록 더 멀리 미래를 볼 수 있다”고 얘기했다. 내각회의 때 당장 전쟁이 어떻게 될 것인지 걱정하는 판에 그리스 문명을 30분이나 떠들어 댔다. 그런 역사적 통찰력이 있었기 때문에 1920년대에 독일의 민족주의 강화를 보며 히틀러의 등장도 예견할 수 있었다.

처칠은 역사적 연속성을 믿었다. 공산주의를 그렇게 싫어한 것은 역사적 연속성을 단절시킨다는 이유에서였다. 영국의 노동당 대표면서 극좌 이론가였던 해럴드 라스키는 처칠이 살았던 시대를 살아보지 않고 처칠을 비판하는 사람들을 비판했다.
 

◆영림원CEO포럼
영림원 CEO포럼은 2005년 10월 첫 회를 시작하여 매달 개최되는 조찬 포럼으로, 중견 중소기업 CEO에게 필요한 경영, 경제, IT, 인문학 등을 주제로 해당분야 최고의 전문가들이 강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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